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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경오’ 프레임은 누가 만들었나
    쓰다 2017. 6. 12. 23:19

    안수찬 한겨레 기자의 페이스북 글. ⓒ 안수찬 기자 페이스북

    덤벼라. 문빠들

    벌써 한 달이 다 됐다. 안수찬 한겨레 기자의 페이스북 글로 촉발된 이른바 한경오(한겨레신문, 경향신문, 오마이뉴스)’ 사태다.

    이미 시간이 꽤 지난 이야기를 지금에서 꺼내는 이유는 냉정히 돌아보기 위함이다. 어떤 사안을 바라볼 때 거리감을 유지하는 건 중요하다. 공간적 거리감도 중요하지만, 시간적으로도 거리를 두는 게 유용한 경우가 많다.

    구체적 사실관계는 이미 어지럽게 온라인상을 돌아다니고 있으니 그 부분을 설명하진 않겠다. 다만, 이번 사태에 대처하는 진보언론의 태도에 대해 한마디 하고자 한다.

    명백한 실수와 오해

    우선 한겨레는 안수찬 기자의 명백한 실수로 대중의 공격을 자초했다. 물론 곧 안 기자가 사과하긴 했지만, “덤벼라. 문빠들이라는 말이 한겨레21 편집장 출신의 기자에게서 나왔다는 사실은 굉장히 충격적이다. 이것은 개인의 실수이긴 하지만, 명백한 실수다. 그리고 한겨레도 이 부분은 인정하고 사과했다.

    다른 하나는 오해다.

    온라인상에서 한겨레를 공격하기 위한 근거로 사용되는 자료 중 하나가 기사 제목이다. 이명박 전 대통령과 박근혜 전 대통령은 대통령이라고 붙여주는데, 문재인 대통령은 그저 이라고 표기했다는 걸 지적하는 글들이다.

    이는 명백한 오해다. 대다수 언론이 지면 편집이라는 관행으로 해오던 일이다. 현직 대통령은 이라고 표기만 해도 다 알 것이기에 간략히 표현하는 것이고 전직 대통령들은 현직과 구분을 지어야 하기에 다 써준 거라고 이해할 수 있다.

    문제는 이러한 지적에 대한 한경오의 대처다.

    오해는 소통의 부재에서 나온다. 한경오가 보다 적극적으로 해명했어야 한다. 해명할 필요가 없다고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원래 이렇게 해왔고 편집원칙에 근거한 것이기에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다고 느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첨예한 상황에서는 적극적으로 설명했어야 한다. 결국, 해명하지 않음으로 추가로 생기는 오해와 불신을 자초한 셈이 됐다.

    사실 한경오는 늘 하던 대로 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보수정권이든, 진보정권이든 해당 언론이 지향하는 바와 가치, 그리고 기사 게이트키핑 원칙에 따라 보도한 걸 거다. 최소한 한경오에는 대선 직전 SBS의 세월호 관련 보도처럼 이른바 작전보도는 없을 거로 생각한다. 그리고 그런 점은 문재인 지지자든 아니든 상관없이 인정하고 칭찬해줘야 할 부분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한경오 프레임은 결국 한경오가 스스로 만들었다.

    한경오 프레임은 한경오가 만들었다

    이 시대 불통의 아이콘인 박근혜 전 대통령을 계속 강하게 비판해온 한경오지만, 이번 사태에서 그들은 자신들을 향한 비판을 전부 비난으로 치부해버렸다. 물론, 실제 비난과 모욕에 가까운 언사들도 많았을 거라 생각한다. 그런데 그건 박 전 대통령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을 거다. 입장의 차이일 뿐이란 소리다. 한경오가 자신들에게 가해지는 비판, 비난 혹은 모욕적 언사가 기분 나빴고 그것이 팩트와 다르다면, 한경오는 오해를 풀기 위해 노력했어야 했다. “덤벼라. 문빠들이라고 선전포고를 할 일이 아니다.

    대한민국은 지난해 촛불시위를 기점으로 또 한 번 크게 변화했다. 가시적으로 대통령이 바뀌었고 비가시적으로 국민이 바뀌었다. 굉장히 짧은 시간 동안 다수의 국민이 민주주의를 실천하고 그 성과를 맛보게 된 거다. 그리고 이러한 경험은 과거의 경험과 연결된다.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라는 비극적 사건과 새로운 문재인 대통령이라는 결과가 연결된 거다. 이런 맥락을 생각하지 않고 늘 하던 대로, 보도하던 대로, 관행대로 움직인 한경오가 한경오 프레임을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지금까지의 여론은 언론이 만들었다. TV, 신문이 이야기하는 것이 진실이던 시대였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이제는 여론이 언론을 만든다. 지난해 촛불정국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지점이 바로 이것이다. 조중동과 종편 채널들도 촛불시위를 보도하기 시작하던 순간이 우리 사회가 한 단계 성숙한 순간이라고 본다. 보도의 동기는 달랐을 수 있다. , 생존, 불안 그리고 일말의 책임감 등.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비로소 언론이 국민의 소리를 제대로 대변하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이른바 엘리트 기자, 엘리트 언론인들은 어색할 거다. 기존에 해오던 방식과 많이 다를 테니까. 하지만 시대가 이미 변했고 낡은 습관을 새로운 기준에 맞추지 못한다면, 과거 영광을 누리던 언론은 구태가 돼 청산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한경오가 청산대상이라는 게 아니다. 하지만 한경오가 변화를 거부하고 소통을 거부하고 국민 여론을 무시한다면 그야 말로 새로운 언론이 필요한 순간이 올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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